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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경포대는 1326년(충숙왕 13) 당시 강원도 안렴사(按廉使)박숙정(朴淑正)에 의해 방해정 뒷산 인월사(印月寺) 옛터에 처음 지어졌다.
1508년(중종 3)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현 위치로 옮긴 후 고쳐짓기를 여러차례 하였고, 1873년(고종 10)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다시 세운 뒤 1934년, 1947년, 1962년에 보수하였다.
경포 호수와 주위의 넓은 들을 감상할 수 있는 비교적 높은 장소에 지어진 이 건물은 기능적인 다양한 공간 구성과 자연과의 융합성이 돋보인다.
1508년(중종 3)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현 위치로 옮긴 후 고쳐짓기를 여러차례 하였고, 1873년(고종 10)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다시 세운 뒤 1934년, 1947년, 1962년에 보수하였다.
경포 호수와 주위의 넓은 들을 감상할 수 있는 비교적 높은 장소에 지어진 이 건물은 기능적인 다양한 공간 구성과 자연과의 융합성이 돋보인다.
경포해수욕장
동해안 최대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며 강문동, 안현동에 있고 시내에서 북으로 6km, 경포대에서 1km 되는 곳에 동해의 창파를 가득 담고 펼쳐진 명사오리(明沙五里)이다.
모두들 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밀려오는 파도, 이를 쓸어 안는 길이 1.8km, 면적 1.44㎢의 하얀 모래밭과 외부와의 세계를 차단하는 듯 둘러 쳐진 송림병품 4km는 정(靜)과 동(動)의 조화로 경포해수욕장 특유의 아름다움이다.
봄은 오리바위와 십리바위에서 밀려와 하얀 모래밭에 흰 빛깔을 내는 초록빛 바다.
여름은 이글이글 타는 더위속에 추억과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바다.
가을은 쓸쓸히 혼자 거닐고 싶은 바다.
겨울은 어디서 누군가가 찾아올 것만 같은 바다로 경포는 사계절 관광지이다.
모두들 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밀려오는 파도, 이를 쓸어 안는 길이 1.8km, 면적 1.44㎢의 하얀 모래밭과 외부와의 세계를 차단하는 듯 둘러 쳐진 송림병품 4km는 정(靜)과 동(動)의 조화로 경포해수욕장 특유의 아름다움이다.
봄은 오리바위와 십리바위에서 밀려와 하얀 모래밭에 흰 빛깔을 내는 초록빛 바다.
여름은 이글이글 타는 더위속에 추억과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바다.
가을은 쓸쓸히 혼자 거닐고 싶은 바다.
겨울은 어디서 누군가가 찾아올 것만 같은 바다로 경포는 사계절 관광지이다.
오죽헌
율곡 이이 선생이 1536년(중종 31) 탄생한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별당 사랑채로 우리나라 주거 건축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 익공 (창방과 직교하여 보를 받치며 쇠서 모양을 내고 초각한 공포재로 초익공과 이익공이 있음) 양식의 건축물이다.
굵직한 장대석(네모지고 긴 석재로 기단에 가로 길게 놓은 돌)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각 기둥위에 둥근 도리(보와 직각 방향으로 걸어 서까래를 받치는 수평재)를 얹었고 지붕은 겹처마이다.
건물 정면에서 왼쪽 2간은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워놓은 마루)의 대청이며, 오른쪽 1간은 뒤쪽 반간에 툇마루(방이나 마루 바깥에 붙여 꾸민 좁은 마루)가 있는 온돌방이다.
측면 창호 문틀에는 중간 문설주(문짝을 끼워 달게 된 기둥)가 있었던 자리에 홈이 파여 있어 오래된 가옥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 익공 (창방과 직교하여 보를 받치며 쇠서 모양을 내고 초각한 공포재로 초익공과 이익공이 있음) 양식의 건축물이다.
굵직한 장대석(네모지고 긴 석재로 기단에 가로 길게 놓은 돌)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각 기둥위에 둥근 도리(보와 직각 방향으로 걸어 서까래를 받치는 수평재)를 얹었고 지붕은 겹처마이다.
건물 정면에서 왼쪽 2간은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워놓은 마루)의 대청이며, 오른쪽 1간은 뒤쪽 반간에 툇마루(방이나 마루 바깥에 붙여 꾸민 좁은 마루)가 있는 온돌방이다.
측면 창호 문틀에는 중간 문설주(문짝을 끼워 달게 된 기둥)가 있었던 자리에 홈이 파여 있어 오래된 가옥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허균생가
이 가옥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집터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실과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자 배치를 하고 있으며 외부를 둘러싼 담이 있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여 남자들은 솟을 대문으로, 여자들은 우물간과 방앗간 옆의 협문으로 출입하였다.
또한 사랑마당과 구분하는 내외 담을 사랑채 옆에 쌓아서 출입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사랑채는 넓은 대청과 방들로 구성되며 전면에 툇간마루가 놓여 있다.
팔작기와 지붕의 높은 처마를 갖춘 장여에 소로 받침이 있는 구조로 전면 기둥은 둥글게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간, 측면 2간의 겹집으로 넓은 부엌과 방, 대청마루가 있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자 배치를 하고 있으며 외부를 둘러싼 담이 있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여 남자들은 솟을 대문으로, 여자들은 우물간과 방앗간 옆의 협문으로 출입하였다.
또한 사랑마당과 구분하는 내외 담을 사랑채 옆에 쌓아서 출입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사랑채는 넓은 대청과 방들로 구성되며 전면에 툇간마루가 놓여 있다.
팔작기와 지붕의 높은 처마를 갖춘 장여에 소로 받침이 있는 구조로 전면 기둥은 둥글게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간, 측면 2간의 겹집으로 넓은 부엌과 방, 대청마루가 있다.
선교장
조선말기의 전형적인 사대부의 저택으로 안채, 사랑채(열화당), 별당(동별당, 서별당), 정각(활래정), 행랑채 등 민가로서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조선후기의 주거생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안채는 170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로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10대손인 이내번이 창건한 것으로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안방과 건너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부엌이 안방에 붙어있다.
안채는 170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로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10대손인 이내번이 창건한 것으로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안방과 건너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부엌이 안방에 붙어있다.